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유시 참변 (문단 편집) === [[홍범도]]가 '독립군 몰살'의 가해자다? === >자유시 참변 논란은 소련 측의 무장해제 요구를 수용하자는 홍범도 장군의 방침을 반대한 사람들의 비난한 결과. 당시 러시아 홍군 측은 '''우리 독립군에게 ‘남의 나라에서 무기를 들고 다녀서는 안 된다’'''고 말했고 무기를 반납하고 허락을 받으면 돌려주겠다고 했다”면서 “홍범도 장군도 처음엔 거부했지만 이대로 가다간 비극적인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를 따르자는 쪽으로 의견이 바뀌었다 >---- >[[https://m.segye.com/view/20230828516596|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 [[2023년]] [[8월 28일]]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과 관련해 기자단에게 입장문을 보냈는데 여기서 국방부는 "자유시 참변이 독립군이 몰살된 사건이며,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 몰살에 연관됐다는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국방부는 "홍범도 장군께서 항일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신 업적은 부정할 수 없으며, 정부도 이를 인정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국방부가 이를 폄훼하거나 부정할 의도는 전혀 없다"면서도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을 지지했다.", "소련공산당의 자유시 참변재판에 재판위원으로 활동했다.", "참변 이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소련 적군 제5군단 소속 조선여단 제1대대장으로 임명됐다.", "이로 인해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다." 등의 주장을 내세웠다. [[https://m.segye.com/view/20230828516596|세계일보]] 그러나 위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 [[https://m.segye.com/view/20230828516596|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의 지적처럼 홍범도는 단지 '''‘남의 나라에서 무기를 들고 다녀서는 안 된다’'''는 [[극동 공화국]]의 '''지극히 당연한 요구'''를 수용했을 뿐이다. * 홍범도 장군은 안무, 최진동, 이청천(지청천) 등 다른 대부분 간도독립군과 함께 이미 자유시 참변의 현장인 수라젭카에 없었다.[*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200~202] * 자유시 참변의 사상자는 수십 명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218p.]이며 우익 성향의 [[권희영]] 교수도 발표 논문에서 최소 사망자의 수를 36명으로 기재했다.[* 권희영, 자유시 사변 연구, 한인 사회주의 운동연구, 서울: 국학자료원, 1999, 208~209p.] * [[니콜라옙스크 사건]]에서도 상세히 설명되지만 상해파 군대를 지휘한 [[사할린 부대]]야말로 [[소비에트]]와 [[볼셰비키]]의 편에서서 민간인에 대한 학살과 약탈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극좌]] 부대였다. 하지만 [[뉴라이트]] 세력들과 [[국방부]]는 이상하게도 이런 극좌 [[소비에트]] 세력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고 이런 전쟁범죄 군대와 반대편에서 섰을 뿐인 홍범도만 가지고 물고 늘어졌다. * 홍범도를 음해하는 진영에선 "이때 레닌으로부터 하사받은 권총으로 홍범도는 생사고락을 함께했을 독립운동지사 2명을 사살했다. 참변의 생존자이자 [[사할린부대]] 출신인 김창수·김오남이 1923년 8월 하바롭스크에서 홍범도에게 참변의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 불시에 공격하자 홍범도는 이들을 사살"한 것으로 물고늘어지는데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3/08/28/2023082800165.html|#]] 그 [[사할린 부대]]가 일으킨 게 [[니콜라옙스크 사건|니콜라옙스크 학살]]이다. * 자유시 참변 당시 [[사할린 부대]] 진압을 지휘했던 이르쿠츠크파야말로 급진적인 한국해방작전을 추진한 세력이었다. "코민테른 극동사무국장 슈먀츠키는 이르쿠츠크에서 조선혁명군을 훈련하고, '''만주를 통해 시베리아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전승 행군을 조직하는 모험적인 계획을 완성했다.''' 그는 칼란다리시빌리의 지휘 하에 조선혁명운동의 거점을 이르쿠츠크에 구축하는데 착수했다." 이미 한국으로 향하는 전승 행군을 실행하는 계획을 '''완성'''한 단계였고 자유시 참변 이후 실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극동 공화국 정부는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에 호소함으로써 슈먀츠키의 모험을 제지할 수 있었다'''. 극동 공화국 크라스노쇼코프 대통령은 극동 공화국 인명혁명군 라핀 총사령관의 의견을 듣고 (61: 라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아는 한, 한국 조차도 동족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에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이 일은 한국으로 향하는 이르쿠츠크의 한인 공산당 사절단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칼란다리시빌리 세력이 한국 국경에 성공적으로 도달할 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 (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221. Op.1. D.376. L.86,89) ) '''일본의 도발을 두려워하며 1921년 6월 치체린과 레닌에게 계획된 모험에 항의'''하는 전보를 보냈다: “…. '''한인들에 대한 슈마츠키의 계획, 일본의 도발을 유도하게 될 계획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특히 그는 한국으로 진군하면서 한인들을 지휘하기 위해 나폴레옹의 모습과 잡음을 일으키며 극동 공화국 전역을 훑고 지나갔던 나이가 들어 의식이 흐릿한 동방 전역에서 유명한 유격대원인 칼란다리시빌리를 수장에 세웠다. 끔찍한 사실은 1) '''4,000 명이 한인들이 블라고베쉔스크의 일본인들 앞에 집결해 약탈, 강간 등 끔찍한 만행을 자행하고 있으며, 자기 측에서 선출된 지휘부에만 복종하고 있다….. 노인네(칼란다리시빌리)가 2 천노리의 한국 진군을 위해 한인들과 중국 영토로 이동한 것은 좀 부드럽게 말하자면, 시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으나, 삼국협약의 눈앞에서 완전히 정당화된 일본의 공격을 유발할 수 있다.” 외교인민위원회는 이에 대한 답변으로 이 '모험을 가능한 한 조속히 중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62: B. D. 소비에트 러시아의 한인들…….. p.73-91 )" 홍범도 장군이 편에 서기만 했을 뿐인 슈마츠키와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야말로 급진적인 한국으로의 전승 행군 계획을 완성해서 실행하기 직전이었고 극동 공화국이 레닌에게 항의를 한 후에야 중지될 수 있었다.[* A.G. 테플랴코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 형사범이자 모험가,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 [[https://m.fmkorea.com/best/3008795647|번역 재인용]]] 이런 헛소문이 돈 것은 윤상원 교수의 논문에도 원인이 있다. 박사학위 논문인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에서 윤 교수는 홍범도 명의라고 명시된 발표문을 사실이라고 인용했는데 이는 주미희(2022), 자유시참변 1주년 논쟁에 대한 고찰, 역사연구(43)에서 반론됐다. 하지만 윤상원 교수의 오류를 사실로 오인했다고 해도 국방부의 주장에는 대부분 근거가 없고 심지어 학살, 약탈 등의 전쟁범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극좌 [[소비에트]] 성향의 [[사할린 부대]]에 대해서 침묵하는 모순까지 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